2023 크리스마스 특촬 합작
< 시속 7억 7천 800만 킬로미터의 크리스마스 >
- 로맨틱 겐지
굉굉전대 보우켄저(2006) / 타카오카 에이지 & 니시호리 사쿠라
공을 위로 던진다. 공이 떨어진다. 공을 다시 위로 던진다. 하나. 둘. 셋. 재키는 속으로만 숫자를 센다. 삼 초가 지나고 나면 공은 공을 던져 보냈던 것과 같은 위치로 돌아온다. 재키는 생각했다. 떠나보낸 것들은 모두 수로 셀 수 있는 시간 다음에 돌아온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엄마가 그랬고, 부정한 피가 그랬고, 끝내 증오하지 못할 야슈라는 종족의 거취가 그랬다. 눈을 감자 아득한 은하수와 태양이 그려졌다. 상상 속에서 유미가 탄 우주선은 항상 그곳을 지나는 중이었다. 인류의 대부분은 모르겠지만. 사실 우주의 빛나는 비밀과 보물을 모두 간직한 자리에 언제나 약속처럼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태어난 땅에 없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재키로부터 떠났다.
재키는 여전히 궁금했다. 그러면 유미가 돌아오는 데는 얼마나 큰 숫자가 필요할까. 만, 이만이면 될까. 혹은 재키가 배우지 않은. 좀 더 머나먼 숫자까지 필요한 것일까.
재키는 상상으로 만든 우주에서 공을 던져보았다. 이번에도 속으로만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공은 별들이 얇은 베일처럼 어둠을 운행하는 가운데를 지나쳐 사라졌다. 점점 멀어졌고. 공은 마침내 돌아오지 않았다.
깨었을 때는 밤이었다. 재키는 꺼진 지 오래인 듯한 서제스 재단 사무실의 전등을 보다가, 누군가 자신을 위해 그 전등을 소등했을 것이라는 한 가지 깨달음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은 곧잘 헛것을 보았다. 흰 손이 컴컴한 사무실 어딘가에서 잠든 재키를 발견하고 그를 위해 불을 거둔 다음 사무실을 떠났다.
다만 유미만은 아닐 손이.
그러자 어쩐지 참을 수 없이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시속 7억 7천 800만 킬로미터의 크리스마스
“다 어디 가는 건데?”
입에 든 파프리카 다 삼키고 말하라고. 레이의 목소리에 이미 반쯤 혐오와 짜증이 실려 있었다. 새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특유의 빳빳함이 덜 죽은 자켓이 레이의 어깨에서 그 위용을 자랑했다. 남색 자켓의 어깨 부분을 몇 번이고 고쳐 만지며 레이가 시선을 흘긋 옮겼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도 모르냐?”
“내가 어떻게 알아.”
“이거 완전 원시인 아냐.”
아까까지 흘러 내릴듯한 각도로 대강 누워있던 시트에 재키는 재차 똑바로 자리를 잡았다. 크리스마스라면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머나먼 유년 아버지와 함께했던 짧은 시절이 회상 끄트머리에 잡혔다. 의지할 수 있는 너른 등이 아직 눈앞에 머물던 나날이었다. 첫눈이 오고 조금 지나면 아버지는 눈처럼 흰 케이크를 사 왔다. 그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린 재키는 아버지와 둥글게 앉아 촛불을 끄는 순간을 좋아했다. 자그마한 불씨 근처에서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후, 불꽃을 불면 잠시간 어둠이 찾아왔다. 재키의 눈이 점점 그 어둠에 적응해 쪽수가 얼마 남지 않은 달력이나 식탁의 실루엣을 볼 수 있게 될 즈음. 아버지는 전등을 켜며 “비록 너의 생일은 아니지만” 같은 말을 덧붙이곤 했다. 그러면 재키와 아버지는 동시에 웃고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아버지는 케이크를 먹기 전 두 손을 모아 짧게 기도했고,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작게 덜어낸 한 조각만을 자기 접시에 담았다. 재키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오랜 세기 전에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남자아이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눈을 감고 기도하는 동안 재키도 아버지처럼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태어난 것을 축하해. 태어나서 아빠와 엄마를 가지게 된 것. 케이크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해. 설탕으로 만든 산타 장식과 딸기가 올라간 케이크는 근사했다. 입에 넣자마자 스르르 녹는 크림의 촉감을 재키는 기억한다. 녹아 사라진 지 한참인 크림의 행방을 추궁하듯 혀가 무의식적으로 입천장을 긁었다. 그걸 크리스마스라고 하는구나.
사무실을 나와서도 여전히 갈 곳은 없었다. 실은 하나와 둘이 대형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페어전을 보러 가기로 했다는 레이가 괘씸해 나온 것도 컸다. 서제스 재단이 하필 도쿄 시내 중심부에 있을 이유는 뭔지. 어딜 가든 북적거리는 인파 탓에 걷고 걷다 포기해 멈춘 곳마저 광장이었다. 관광회사가 들어선 큰 빌딩을 기준으로 네모나게 형성된 광장에는 건물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트리가 놓여 있었는데. 당신의 존재야말로 선물이라고 적힌 빨간 플랜카드가 눈에 거슬릴 정도로 펄럭이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색색이 전구가 반짝거리고 바람이 나부끼는 트리 아래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재키는 그 모습이 조금 못마땅해 부러 건방지게 몸의 각도를 비틀었다.
저토록 수많은 사람이 어디선가 태어나 서로의 존재를 깨닫는다. 기뻐해야 할 날에는 함께 모여 기뻐할 것을 약속한다. 추우면 손을 잡거나 더우면 벗은 외투를 들어줄 것, 먼 곳으로 말없이 떠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재키에게는 여즉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규율들이었다. 그러나 거기 있음을 전혀 모른 채 지내왔던 시간과 적어도 거기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 뒤의 시간은 달랐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마음 혹은 누군가가 손을 잡아주길 바라는 욕심 같은 것. 언젠가 불필요하며 성가시다고 규정했던 막연함에 대해, 이제 재키는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했다. 자기 내부에 모호하게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를 정확히 벗겨내고 마주하는 순간 느껴지는 해방감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이것은 외로움. 이것은 서러움. 그런 명명을 하나하나 입혀갈 때마다. 재키는 이 과정이 마치 긴 달리기 끝에 잠시 고르는 숨처럼 후련하다고 생각했다. 의지 가능한 타인의 등에 기대어 뱉는 숨은 다디 달았다. 답잖게 생각을 거듭하자 머리가 아파진다. 재키는 고개를 쳐들고 부연 입김을 한참 만들었으나 곧장 재미가 없어졌다. 무용한 장난은 그만두고 손을 꽉 쥐었다 피었다. 마디 마디의 관절이 뻐근했다.
“재키?”
전혀 예기치 못한 등장이었다. 손을 쳐다보느라 푹 수그렸던 등이 순식간에 펴졌다.
“유미?”
우주 보물을 향한 첫 여정은 아주 길지 않았어서. 기껏해야 달 언저리를 몇 달간 비행하고 돌아온 것에 지나지 않았노라고 유미는 말했다. 어쩐지 장소는 또 디저트 가게였다. 방금 떠나온 광장보다 들뜬 여자들로 넘쳐났다. 비장한 표정을 한 유미가 가게 점원에게 엄청나게 긴 이름을 쉴 새 없이 읊더니, 이윽고 나온 것은 오 단짜리 파르페였다. 파르페가 너무 길고 거대해 심지어 컵 옆에 장식을 기댈 빵 기둥이 따로 딸려 나왔다. 당황한 재키가 탄식하는 동안 유미는 벌써 일 단을 먹어 치웠다. 이 맛이 그리웠다고 웃는 유미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키는 다른 대답을 덧붙이거나 장난을 거는 대신 응, 하곤 파르페 아래의 작은 딸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일 년만의 재회였다. 그냥 그런 말 외엔 유미에게 아무것도 건넬 수 없었다.
“이것만 먹고 금방 가 봐야 하거든. 우주선의 연료 보급 문제 때문에 발목이 잡힌 거라.”
“언제 왔는데 벌써 간다는 거야.”
“세 시간 전쯤.”
“다음은 어디로 가고?”
“목성까지야.”
“모르고 들으면 집 앞에 야채 사러 가는 줄 알겠구만.”
유미가 멋쩍게 웃었다. 그 웃음을 마저 지켜보지 못하고 재키는 고개를 돌렸다. 턱을 괴고 내다본 창밖에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가졌기에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보물과 괴담을 모르고도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
인류라 불려온 자들이 걷고 있었다.
파르페를 다 먹은 다음 둘은 광장을 함께 걸었다. 관광회사의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는 하와이 관광 패키지의 홍보 영상을 보며 유미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바다를 묘사하는 푸른 빛을 받아 유미의 속눈썹들이 희게 반짝거렸다. 재키는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근사하다는 표현을 붙였다가 홀로 진저리쳤다. 드문드문 문장이 끊기긴 했지만 함께 트레저 포스로 지낸 계절, 케인과 둘이 다니는 탐사가 얼마나 즐겁고 때로 답답한지, 또 레이가 얼마나 팀장 역할에 맞지 않는 다혈질의 성미를 지니고 있는지 두 사람은 이야기했고 자주 웃는 것으로 대답을 흐렸다. 대화 사이사이 문득. 재키의 안에서 유미가 이 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무척 낯설게 환기되었다. 가로등 불과 늦게까지 환희를 덜어낼 기미 없는 상가의 간판 불이 섞여 유미의 살갗 위에 혼재했다. 그것은 본 적 없는 우주를 닮아있었다.
유미는 머나먼 하늘의 어느 지점을 가리켜 저곳 즈음에 달과 무척 가까운, 하지만 지금까지는 인류에게 관측된 적 없는 소행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곳에는 행성의 내핵에서 배어 나온 직후 바로 결정으로 얼어버리는 액체가 있어 샘플을 채취하기 무척 힘들었다는 약간의 투정이 덧붙었다. 고전 끝에 케인과 유미가 택한 채취 방법은 액체가 나오는 자그마한 틈새를 맨손의 온기로 감싸 녹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재키가 제 두 손을 찰싹 붙여 보였다. 그래. 그렇게.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액체를 녹이면 다른 사람이 밑에서 그 액체를 받는 거야. 온기를 받으면 액체가 굉장히 따뜻해져서 저걸 먹으면 어떻게 될까,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작전 중이니까 말은 하지 않았어. 유미는 중얼거리는 데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소행성에서의 기억이 이미 유미를 사로잡은 것처럼 보였다. 아마 보이지 않는 상상과 회고의 저편에서 유미는 여기가 아니라 그 행성에 서 있는 걸 테다. 재키는 유미의 두어 발짝 뒤에 멈춰 섰다.
“레이 자식이 그러던데. 오늘이 크리스마스인지 뭐시긴지라고.”
“응?”
“유미는 받고 싶은 선물도 없어?”
난처한 건지. 의외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건지. 오묘한 낯빛이던 유미의 얼굴에서 끝내 하나의 문장이 튀어 나왔다.
목성에서 지구까지는 7억 7800만 킬로미터의 거리가 펼쳐져 있다고 한다. 그곳은 태양계에서 다섯 번째 행성이자 가장 큰 행성이다. 우리가 사는 행성을 비롯해 다른 모든 행성을 합해도 목성의 질량에는 미칠 수 없다. 만약 중력이 있는 7억 7800만 킬로미터를 향해 공을 던진다면 공이 돌아오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지. 대체 몇만 초를 세어야 그 공은 내게로 돌아오는 것인지.
사실 네가 울던 때. 나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어. 넌 내 손을 잡고 울었지. 아주 서럽게 울었지.
처음 만난 날 유미의 심장은 얼음 아니면 총알로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도 눈물을 아는구나.
아니면, 그저 기분 좋은 착각이겠지만,
네 심장 역시 눈물을 가졌다는 걸 일깨운 게 나였을까.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내 삶도 너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고 그렇게……
“돌아왔을 때 오늘처럼 여기 있어줘.”
유미가 떠난 거리에서 재키는 우주를 올려다보았다. 달이 환하니 산타나 썰매 따위 거기 있을 리 없다는 사실만 명확해졌다. 대신 재키는 유미가 태어났고 살아있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제게 쥐어진 선물을 곱씹어 보았다. 그것은 약속이다. 깨지지 않을 맹세. 어느 문서에 기록되지 않아도 좋은 단 한 줄의 말.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재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말은 유미에게 닿지 않겠지만. 은하를 헤쳐 나가는 자그마한 공처럼 막연한 것이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해 도쿄에는 역대급 폭설이 기록되었다.
지구 전체로서 따져도 이례적인 양이었노라고, 뉴스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