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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lucky > - 자갈 

초광전사 샹제리온(1996) / 쿠로이와 쇼고 & 미나미 에리

 인간계의 보이지 않는 룰에 따르면, 보편적인 사람은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나와 자신을 기다려주는 상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그를 신뢰하게 된다고 한다. 이른 바 '사귄다'라고 정의되는 관계에서는 그것이 일정 부분 견고한 애정의 형성에도 기여한다고 하니 개인적으로 공감이 가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 약속이란 건 시간을 넘겨버리지만 않으면 그만인 게 아닌가- 나는 이 규칙을 충실히 따랐다. 시계를 보니 아직 정해진 시간보다도 삼십 분을 앞서 있다. 뒤편 건물에서는 레스토랑의 종업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영업을 준비하는 중이었고 일찍이 틀어 둔 크리스마스 캐롤이 은은하게 창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의 치밀한 계획과 탁월한 실행력으로 말미암아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를 이미 확보했으니까, 우리는 예약한 시간에 맞춰 오기만 해도 아무 수고를 들이지 않고 정해진 수순으로 만찬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문을 열지도 않은 가게 앞에 우뚝 서서 눈밭 위를 걸어 다니는 행인이나 하염없이 구경해야 하다니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인가. 하지만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하면 상대는 저 멀리서 내 모습을 알아보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발그레한 얼굴로 ‘벌써 와 있었어?’ 따위의 말문을 열겠지.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반갑게 웃음을 띠며 대답하면 그녀는 감동에 겨워 내 팔짱이라도 끼고 앞장 설지도 모른다. 오늘에 앞서 우리는 많은 교류를 거쳤고 그녀는 이미 내게 적잖이 그윽한 애정을 내보이고 있다. 크리스마스라는 명목으로 인간의 감정이 일제히 들뜨는 시기. 호감을 담은 눈빛과 재치 있는 입담, 그 사이로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 몇 가지 사랑의 언어. 그녀가 내게 반할 조건은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그렇게 무르익은 감정으로 내게 사랑을 말하는 순간이야 말로 내가 그녀의 생명 에너지를 들이마실 기회다. 나는 웬만한 인간들보다도 여자의 마음을 능숙히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제껏 나의 식사에는 어떤 실패나 오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연이네.”

 단 한 명을 제외하면.

 “...에리?”

 미나미 에리는 내가 버릇처럼 내뱉던 그 말로 내게 인사했다. 가지런히 우산을 쥐고 짙은 남색 코트를 두른 모습은 변함없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뜻밖의 조우에 놀란 건 에리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눈을 한번 커다랗게 뜨고서 찬찬히 나의 모습을 살폈다. 에리의 시선은 내가 한 손에 쥐고 있는 선물상자에 잠시 머물렀다가 내 등 뒤의 건물을 향했다. 그래, 에리가 모를 리가 없지. 에리는 S.A.I.D.O.C.의 유능한 인력이고 더없이 현명한 사람이니까.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진작 알아차렸을 것이다. 에리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대로구나. 쿠로이와는.”

 “어쩔 수 없잖아. 너도 바꾸지 못한 나를 이제 와서 누가 고쳐?”

 낯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래, 나는 에리를 사랑했다. 인간의 생명 에너지를 먹기 위해 줄곧 인간을 사랑하던 체하던 내가 처음으로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인간인걸. 날 아껴주던 그 눈길과 다정한 말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총탄 따위에 맞아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에리가 내게 입을 맞추어 주던 그 때의 온기를, 두근거림을, 아린 마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다크 자이드는 멸망해가던 고향으로부터 도피한 존재. 다른 차원에 억지로 정박한 몸은 인간의 생명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존재다. 내가 에리를 사랑하는 것과 나의 종족이 처한 위기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에리는 내게 간절히 말했다. 내 비서 유리카를 내보내고, 더는 인간의 생명 에너지를 먹지 말라고. 인간이 되어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나는 그 무엇 하나도 이뤄줄 수 없었다. 인간의 세계에 침투해 가까스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그 어떤 조건도 묻지 않고 나를 위해 사력을 다해주는 전력을 함부로 내칠 순 없었다. 또한 다크 자이드가 인간의 형성을 유지하려면 인간의 생명력이 필요하다. 암차원에서의 본모습으로 나돌아 다녔다간 ‘힘’을 가진 인간에게 제거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유리카를 내치지 못했고, 에리라는 인간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인간의 생명력을 먹어 치웠다.

 뭐, 그러다 보니 인간이 되는 것도 무리였고 에리는 내 곁을 떠났다. 그런 맥 빠지는 이야기였다.

 그 입맞춤은 이미 돌려줬을 텐데. 

 “내 생각이 맞다면 오늘이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겐 오늘이 정말 기쁜 날일 건데. 조금 가엾어서.” 

 

 에리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 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에리의 목소리는 힐난도, 경멸도 아니었다. 내가 줄곧 익혀 온 인간의 감정, 그 경우의 수에 따르면 에리가 건네는 것은 연민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를 향해서.

 그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거야, 너는? 에리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에리의 소망을 배반하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이 입으로 무엇을 말하더라도 에리가 실망하는 경우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됐어, 오늘은 관둘래.”

 “...이대로 가는 거야?”

 “이미 다 알고 있지 않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목숨을 뺏기느니 차라리 하루 바람 맞고 마는 게 더 나을 걸, 그 사람한테도. 물러나 주는 건 오늘만이야.”

 곤란하다. 말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발을 재촉했다. 이런 경우에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묵비권 밖에 없다. 얼른 여기를 벗어나야지.

 알고 있는가, 묵비권이란 17세기 말엽 영국에서 청교도를 향한 가혹한 신문을 반대함으로써 확립된 권리이며 형사책임에 관하여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는….

 속으로 아무 말이나 되뇌이면서 무작정 걸어 나가던 중에 시야가 뒤집어지고 세상이 거꾸러졌다. 뺨과 손바닥에 닿는 시린 감각으로 보아 나는… 넘어진 게 분명했다. 젠장, 이 무슨 볼썽사나운 모습인지. 엉거주춤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 내 머리 위로 우산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쿠로이와, 일어설 수 있겠어?”

 에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이 손길은 처음 보는 행인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졌을 호의라는 걸. 이제 와서 나를 향한 특별한 의미가 있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그런데도 나는 온전히 내 발로 일어나기보다는 에리가 건넨 손을 잡아버리고 만다. 온 길이 얼어 있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니까 이렇게 된 거잖아. 에리는 맞잡은 내 손을 끌어당겼다. 덕분에 나는 금방 중심을 잡고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머리카락과 외투에 묻은 눈송이를 조심스레 털어내었다. 에리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살포시 아래로 떨어뜨리며 내게 말했다.

 “...너, 눈길을 걸어 본 적이 없구나. 처음인 거지? 다루마상(だるまさん)처럼.”

 정말이지 에리는 예리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인간계의 지식을 먹어 치웠지만 세상에는 오감으로 직접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그 경험 마저도 결국 내 것으로 만들어 내었지만 이른바 하늘이 돕지 않는 이상 도리가 없는 일도 있다. 다크 자이드가 인간계로 이주한 이래로 도쿄에 이 정도의 눈이 쌓인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는 거다.

 “암차원이라는 이름이 허투루 있는 건 아니니까. 우리 세계에는 어둠 밖에 없어. 그러니까 눈 같은 걸 봤을 리가 없지.”

 나의 주도면밀한 하루는 에리가 등장함으로써 이미 말아먹다시피 했다. 한술 더 떠서 그 에리가 보는 앞에서 꽁무니를 빼다 넘어지기까지 했으니 더 망가질 것도 없어서, 나는 정말이지 아무렇게 주워섬겼다. 차라리 질색하면서 내게 등을 돌려주면 좋을 텐데, 에리는 나를 꼿꼿이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지킬 수밖에 없어. 그래도 나는 네가 눈길 위에서 넘어지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야. 쿠로이와.”

 내가 사랑했으니까. 에리는 들릴 듯 말듯 아주 작은 속삭임을 남기고 왔던 길을 돌아 사뿐사뿐 걸어 나갔다. 내게 다가오던 발자국과 나를 떠나가는 발자국. 나는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키는 그 자취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하루를 신성하고 기쁜 날이라 했는지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은 지경이다. 나는 두 번 다시 넘어지기 싫어 두 팔과 다리로 균형을 잡은 채 조심스레 사무실로 걸어갔다. 춥네,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도 한기가 가득 스며 있었다. 나는 내 보금자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비서가 내게 내미는 것이 블루 마운틴이든 다 태워버린 커피콩에서 우러난 물이든 무작정 들이켤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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