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신년 특촬 합작
< 어떤 결말의 원시심성 > - 라이더는 실존한다
가면라이더 지오(2018) / 백워즈 & 묘코인 게이츠 + 토키와 소고 & 워즈 + 백워즈 & 흑워즈
[게이츠, 신년 참배 가자!]
메신저 알림을 들은 게이츠는 반강제로 눈을 떴다. 그는 두꺼운 차렵이불 속에서 비틀거리면서 기어나와 휴대전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꼭두새벽부터 연락을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짐작을 입증하듯, 발신인에는 소고의 이름이 예사롭게 깜박이고 있었다. ……신년 참배라. 그제서야 어제부로 해가 바뀌었고 오늘은 헤이세이 31년이 개벽한 첫날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뒤이어 내용의 방대함 때문에 앞뒤로 유리되었던 소고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워즈가 파워 스폿을 추천해 줬거든. 걸어서 이십 분 정도만 가면 되는 곳에 있는 신사인데, 소원 성취라든가, 시험 합격 같은 데 효험이 있대. 매년 새해에 일부러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도 꽤 많을 정도로……]
메시지는 여기에서 끊겼다. 그러게 전자 메일 말고 라인을 쓰는 편이 좋다니까.
[……인기 있는 장소라나 봐. 츠쿠요미는 봉사 활동이 끝나고 바로 신사로 가겠다고 했으니까 그쪽에서 만나면 될 것 같아. 우선은 우리끼리 출발하는 걸로 어때? 생각 있으면 답장 줘!]
어차피 상대가 자신의 요청에 당연히 응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권유했을 텐데도 ‘생각 있으면’ 같은 완곡한 표현을 쓴 것이 얄궂게 느껴졌다. 게이츠는 베개에 한쪽 얼굴을 기댄 채 곤비함이 덜 가신 기색으로 답신을 보냈다.
[갈게]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몇 가지 문장을 덧붙였다.
[다 좋은데 워즈 녀석은 웬만하면 데려오지 마라]
[그 녀석이 있으면 귀찮아지니까]
*
‘데려오지 말라’는 게이츠의 당부가 무색하게 소고는 보란 듯이 워즈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것처럼 도끼눈을 뜨는 게이츠를 향해 그는 ‘워즈가 자기도 꼭 오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라고 다소 궁색하게 들리는 해명을 하면서 엉거주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다가 그 신사로 가는 길은 워즈가 잘 아는걸. 안내를 받으려면 워즈가 있는 편이 좋잖아.”
“……마음에 안 들지만, 그건 정론이군.”
결국 워즈가 동행하는 것에 게이츠가 마지못한 동의를 표하자, 둘에서 셋으로 추슬러진 일행은 곧 워즈의 인도에 따라 신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산등성이를 아우르는 소담한 산책로를 향해 그들을 이끌었다. 길의 초입에 이르러서 소고는 휴대전화로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켜려고 했지만 워즈가 제지했다. 그런 조잡한 기술보다 자신을 신뢰해 주었으면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소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휴대전화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워즈는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한다니까. 갑자기 내 방에서 불쑥 나타나더니 여기서 지내고 싶다고 다짜고짜 선언할 때도 그랬지만.”
“너만하겠냐.”
“뭐야, 게이츠? 그거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거야?!”
“최소한 말귀가 어둡지는 않으니 다행인가.”
소고와 게이츠가 만담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워즈는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가세했을 법도 한데, 그는 단지 중간중간 빙그레 웃거나 손톱 끝을 매만지는 등의 행동만을 반복했다. 게이츠는 그것을 기묘하게 여기면서 그를 바라보았지만, 워즈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곧 눈길을 거두어 버렸다. 오히려 정말로 기묘한 것은 그들이 거치고 있는 길의 행색이었다. 처음에는 평탄하기만 했던 길은 산에 가까이 접근함에 따라 점차 험난해졌다. 돌부리와 나뭇등걸 따위가 부지기수로 늘어났고 흙은 이제 무르다 못해 질었다. 도회지의 소음은 완전히 잦아들어서 그들 주변에는 나뭇잎이 서로를 스치는 소리와 나지막한 새의 지저귐 따위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사뭇 의아해진 소고는 그의 옆에서 걷고 있는 워즈를 향해 말을 걸었다.
“워즈, 이쪽으로 가는 게 맞아? 아무래도 이대로는 산 안쪽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은데.”
“응, 나의 마왕. 산의 조금 깊은 곳에 있기는 하지만, 그만큼 영험하다고
입소문을 타서 등산객들도 빈번하게 방문하는 곳이지.”
워즈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그의 옆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고, 또 자신에 차 있었으므로 소고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는 관자놀이를 뻐근하게 문질렀다. 해는 하늘의 고지를 점령하고 타올랐다. 어느덧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 된 것 같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꽤 힘들다. 이래서야 완전히 등산이잖아. 이십 분 정도만 걸으면 될 거라고 게이츠한테 얘기해 뒀는데, 좀 미안해지네.”
“미안하면 내일 카레 우동 쏴.”
“엑.”
“소고기 든 걸로.”
“에엑.”
“뭐가 엑이고 에엑이냐.”
게이츠가 소고의 안면을 억세게 움켜잡자 소고는 의례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지켜보던 워즈는 고개를 내젓고 제멋대로 자라난 풀숲을 가로질렀다.
“다 왔으니까, 드잡이는 그쯤 해 둬. 이쪽으로.”
과연, 풀숲을 제치고 나오자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토리이가 신사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 표지판과 함께 그들의 머리 위로 엄숙하게 드리워졌다. 토리이에는 읽을 수 없는 글자가 가타카나로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꼭 진언의 일종처럼 보였다. 워즈는 앞장서서 토리이의 한가운데를 통과했고, 소고와 게이츠는 토리이 옆으로 뻗은 샛길을 따라 안으로 향했다. 지금쯤 참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경내는 쥐 죽은 것처럼 고요했다. 워즈는 개의치 않고 빠르게 걸어서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본당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걸음을 옮기던 소고는 문득 이상하게 조급해진 워즈의 태도와, 파워 스폿이라는 명망에 비해 적요하고, 또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신사의 모습으로부터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꼈다. 직전까지 산보라도 하듯이 느긋하던 것과는 달리, 이제 워즈는 두 사람을 서둘러 신사의 깊은 곳까지 데리고 가고 싶은 것 같았다. 본당으로 가는 길목에 이르러, 왕성하게 자란 나무의 탓으로 하늘은 금세 어두워졌다. 돌 위에 더부룩이 낀 붉은색과 초록색 이끼는 이곳을 더더욱 바깥과 단절된 장소처럼 보이게끔 만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작은 연못과 폭포가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아래로 흐르는 폭포에서는 연신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엉킨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게슴츠레 비쳤고, 앞서 가는 워즈의 발치에 뭉툭한 그림자가 한 움큼 고였다. 게이츠는 소고의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 역시 신사의 황량함이 영 미심쩍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게이츠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어이, 소고. 정말 여기가 맞는 장소인 거냐?”
소고 역시 게이츠에게 겨우 들릴 정도의 반경으로 소곤거렸다.
“나도 잘 모르겠어. 참배객도 많다고 했는데, 우리 말고 사람은 전혀 안 보이고. 일단은 워즈를 믿고 있기는 하지만. 본당 쪽으로 가면 조금은 붐비게 되지 않을까?”
“입구에서부터 이렇게 한산한데 본당이라고 붐빌 리가. 물어봐.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아까 물어봤잖아?”
“한 번 더 물어보라고.”
“왜 게이츠가 직접 묻지 않고?”
“…….”
소고가 웃었다.
“아, 워즈한테 말 걸고 싶지 않구나?”
“……저 녀석은 영 마음에 안 든다고. 너는 지오로서 저 녀석과 함께 싸운 기억이 없어서 괜찮은 모양이지만, 난 아니야.”
“이상하네. 같이 싸운 기억이 있다면 오히려 더 친근하다고 느끼게 되지 않아?”
“그것도 기억 나름이지. 됐고, 물어보라니까.”
“네. 네.”
놀리듯이 수긍한 소고는 곧 워즈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려고 하다가 이내 기겁하며 게이츠의 팔을 붙잡았다. 놀란 게이츠가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게이츠, 저기…… 저쪽에.”
소고가 가리킨 곳은 폭포의 발원지인 절벽이었다. 물소리만이 줄기차게 들릴 뿐, 그곳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게이츠가 반문하려던 찰나, 낙하하는 물줄기 옆으로 검은 형체가 언뜻 보였다. 그것은 절벽 위를 빠르게 기어 다니면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었다.
“벌레인가? 벌레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데…….”
소고가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내밀던 게이츠는 그것이 다리가 아닌 팔꿈치를 써서 바닥을 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소스라쳤다. 그것의 얼굴은 완전히 뒤로 꺾여서 기이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부릅뜬 두 눈의 면적이 지나치게 컸고 검은자위가 없었다. 소고와 게이츠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함께 비명을 질렀다.
“워즈! 좀 멈춰 봐! 여기 이상한 게 있어!”
패닉에 빠진 소고가 외쳤지만 워즈는 듣지 못한 것처럼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소고는 몸을 돌리고 황급히 그를 쫓아서 뛰다가 신발 밑창에서 뭔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멈췄다. 디디고 있던 바닥이 앞에서부터 차츰 허물어지고 있었다. 일순 부유하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체중이 불시에 앞으로 쏠렸다. 무심코 균형을 잃은 소고는 휘청거리면서 주변을 에워싼 나뭇가지를 붙잡고 간신히 버티고 섰다. 그는 눈길을 밑으로 내렸고, 이내 경악했다. 돌멩이 몇 개가 그의 옆으로 맥없이 굴러 떨어지면서 흙먼지를 일으켰다.
아래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있었다.
만약 떨어졌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정도로 아찔한 높이였다.
……워즈를 따라서 한 걸음이라도 더 갔으면 분명 추락하고 말았겠지. 입술을 살짝 깨문 소고는 고개를 들었다. 워즈는 여전히 그보다 몇 뼘 앞에서 절벽 너머의 허공 위를 태연하게 걷고 있었다. 아니, ‘걷는 것처럼’ 다리를 움직였지만 그와 워즈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았다. 워즈의 그림자가 소고의 바로 목전까지 늘어졌다. 이상했다. 아무리 워즈가 그보다 키가 한참 크다는 것을 감안해도 사람의 그림자가 이렇게까지 길 수는 없었다. 소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워즈?”
워즈는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그림자가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고는 기함했다. 갖가지 이변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귓가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뒤섞여서 들렸다. 그것은 꼭 씨근덕대거나 이를 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썩은 고기 냄새를 풍기는 차갑고도 위협적인 숨결이 목덜미에 훅 끼치는 순간, 소고는 펄쩍 뛰어서 뒤로 물러섰다. 저것은 워즈가 아니었다. 도저히 워즈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워즈처럼 보이는 것’으로부터 즉각 등을 돌리고 사력을 다해 질주했다. 달려오는 자신을 얼떨떨하게 응시하던 게이츠의 손을 낚아챈 뒤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는 토리이를 향해 뛰고 또 뛰었다. ‘워즈처럼 보이는 것’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비로소 드러난 그것의 눈은 새까맣게 탄 채였고, 팔은 관절이 전부 거덜난 것처럼 흐늘거렸으며, 다 벗겨진 피부는 재처럼 날리고 있었다. 등을 한 차례 구부렸다 편 것뿐인데 그것은 단숨에 그들을 바짝 쫓아왔다. 수챗구멍에서나 날 법한 악취와 비린내가 코앞에서 맡아졌다.
“뭐야, 소고?”
“뒤돌아보지 마!”
당황한 게이츠를 소고는 억지로 달리게 했다. 두 사람은 붓글씨가 휘갈겨진 표지판과 다 쓰러져 가는 배전, 녹이 슨 봉납함 등을 잇따라 지나쳤다. 소고는 몇 번이고 발을 헛디뎠지만 멈추지 않았다. 땀 때문에 게이츠의 손이 자꾸만 미끄러질 때마다 필사적으로 고쳐 잡았다. 토리이를 빠져나와서도 게이츠를 이끌고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던 그는 그만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히고 나동그라질 뻔했다. 충돌의 여파로 뒷걸음질을 친 상대가 이내 소고의 어깨를 작위적이면서도 온화한 손길로 붙들었다.
“온통 사색이 되어서는.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마왕?”
그는 소고를 향해서 말을 걸었지만 게이츠가 먼저 상대를 알아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그가 빙그레 웃었다.
“다시 봐서 기쁜걸, 나의 구세주.”
“백워즈?!”
어나더 디엔드를 자처한 백워즈가 스스로 라이드워치를 삼켰다가 끝내 패배하고 ‘워즈’에게 흡수된 이후, 실로 오래간만의 재회였다. 소고와 게이츠는 당혹감이 역력히 드러나는 얼굴로 백워즈를 바라보았다. 특히 게이츠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사가 다시 쓰이기 전의 백워즈는 ‘구세주’ 게이츠를 보좌하는 한편 소고 일행의 아군으로서 행동했고, 실제로 어나더 월드에 갇힌 게이츠를 구출하는 데 크게 기여한 바 있었다. 하지만 마왕의 힘을 얻은 소고가 세계를 한 차례 개변한 뒤에 그는 자신이 직접 구세주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고서 소고와 게이츠의 앞에 나타났다. 이 백워즈가 둘 중 어느 쪽의 ‘백워즈’일지 게이츠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추격해 오던, ‘워즈’의 모습을 한 무언가보다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런 게이츠의 의심을 간파한 백워즈가 먼저 선수를 쳤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데. 나의 구세주, 그리고 마왕. 무슨 일을 겪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나를 따라오는 편이 좋을 거야. ‘또 다른 나’로부터 너희를 데리고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거든.”
“’또 다른 나’라면……. 워즈의?”
백워즈는 게이츠와 소고에게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그래. ‘또 다른 나’도 너희가 보이지 않아서 여간 곤란한 게 아닌 모양이던데. 너희를 찾기 위해 이 나의 힘을 빌리려고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우리가 보이지 않다니……. 워즈랑은 아까부터 줄곧 함께였는데……. 그렇지, 게이츠?”
소고가 동의를 구하듯 게이츠를 응시하자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백워즈는 눈썹을 들어올리더니 여전히 불길하고 섬뜩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신사의 부지를 돌아보았다.
“그런가. 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것도 같네.”
“정말?”
“뭐, 요컨대 너희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한 무언가의 꾐에 넘어가고, 일종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이곳으로 유도된 거겠지.”
그는 굳이 ‘유령’이라는 단어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가는 게이츠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나의 구세주, 그리고 마왕. 나를 따라올 건가? 설령 내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장소에 오래 머무는 건 나로서도 결코 추천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소고와 게이츠는 불안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불쑥 솟아오른 토리이의 그림자가 꼭 그들을 향해 손짓하는 듯했다. 일대가 조용한 것을 보아 ‘워즈처럼 보이는’ 무언가는 어느새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단 일 초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백워즈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 허리를 조금 숙였다.
“역시, 판단이 빠른 구세주와 마왕이군. 그럼 함께 갈까.”
“워즈가 있는 곳은 어디인데? 많이 멀어?”
“설마. 바로 이 근처야. ‘또 다른 나’도 너희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헤매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을 걸.”
소고는 한 손으로는 게이츠의 옷깃을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고르는 것 같은 포즈를 취했다.
“다행이다……. 나 이제 십 분 이상 걷는 건 체력적으로 도저히 무리니까.”
“이런, 부축해 줄까, 마왕?”
“됐네요. 게이츠한테나 신경 써 줘.”
“그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나의 구세주는 성정이 투박해서,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는 게 서툴거든.”
“시끄러워.”
그들은 입씨름을 주고받으며 신사와 인접한 산길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
백워즈의 말대로, 워즈는 문제의 신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너른 공터를 서성거리며 ‘진 봉마강림력’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인기척을 들은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이윽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백워즈와 게이츠, 소고를 발견했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나의 마왕?”
(백워즈와 게이츠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으로 보아) ‘진짜’ 워즈임이 틀림없었다. 소고는 안도감으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워즈의 품에 몸을 반쯤 기대다시피 하며 미끄러졌다. 워즈는 조금 의아해 보였지만 곧 소고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집어넣고 그를 능숙하게 받쳐 주었다.
“꽤 늦었네. 게다가 그 얼굴은, 엉망이잖아. 어떻게 된 일일까.”
“그게 말이지, 워즈가…….”
“내가?”
“신사로 안내해 주겠다면서 게이츠랑 나를 이상한 곳으로 유인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소고는 대뜸 워즈의 눈과 팔을 서슴없이 만졌다. 그 나름대로 자신이 본 것의 외양을 묘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워즈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움찔거렸지만 최선을 다해 태연한 기색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변해서는 나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지 뭐야. 윽,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마음이 놓인 나머지 평소보다 집요하게 하소연을 하던 소고는 입을 다물며 슬쩍 워즈의 안색을 살폈다.
“물론 그건 진짜 워즈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니지?”
“무슨 소리야. 물론 아니지, 나의 마왕. 나는 줄곧 쿠지고지 당 앞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었어. 한참이 지나도 게이츠 군도 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츠쿠요미 군과 먼저 가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소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게이츠도 그것과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아까 우리가 만난 워즈는 역시…….”
게이츠가 소고의 말을 받았다.
“……가짜였던 건가.”
“가짜라고 할까, 조금 전에 백워즈가 말한 것처럼 홀린 거 아냐? 유령의 짓이었던 거지.”
“헛소리 마! 유령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게이츠가 빽 고함을 질렀고, 소고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내면에서 활개를 치던 근심과 두려움은 ‘진짜’ 워즈와 만난 것만으로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이내 소고의 시선은 워즈의 옆에서 자제하는 시늉을 하며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백워즈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니 워즈, 백워즈랑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백워즈는 분명히 저번에 어나더 디엔드가 되었던 걸, 워즈가…….”
“먹어치웠지. 돼지처럼.”
조금 진정한 게이츠가 덧붙였다. 워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그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뭐, 단순히…… 내가 직접 너희를 찾아 나선다면 엇갈릴 위험이 있으니까. 나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거든. 그래서 그의 움직임을 내 통제 아래에 두고 잠시 나로부터 분리했어.”
“덕분에 나는 네 주변에서 떨어질 수 없는 신세가 됐지, 또 다른 나.”
마치 강제로 당했다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백워즈는 만면에 능청스러운 미소를 띤 채 워즈에게 손을 뻗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뒷목에 빈틈없이 달라붙자 워즈는 진저리를 쳤다. 소고는 그것이 못내 신기했다. 워즈가 저렇게 덮어놓고 적대하는 상대라니.
“아무튼, 나랑 게이츠는 거의 처음부터 그, 유…….”
게이츠가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것을 본 소고는 잽싸게 다른 단어를 골랐다.
“……정체 모를 뭔가에 홀려 있었다는 거네. 애초에 워즈가 말한 신사도 사실은 거기가 아니지?”
“그 말대로야, 나의 마왕. 내가 소개해 주려고 한 신사는 이 옆에 있는걸.”
워즈는 공터의 맞은편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출구와 이어진 횡단보도 너머에 크고 붉은 토리이가 보였다. 그 아래에는 참배를 위해 방문한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장황한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고성과 웅성거림이 연신 오갔다. 소고와 게이츠는 어안이 벙벙했다. 주변을 맴돌던 도중이라면 진작에 발견하고도 남았을 만큼 왁자지껄한 인파였다. 왜 여태껏 눈치채지 못했을까? ‘홀렸다’는 워즈의 말은 여지없는 진실인 모양이었다. 망연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의 등을 워즈가 살짝 밀었다.
“그런 고로…… 조금 늦었지만, 내킨다면 지금이라도 참배하러 가는 게 어때, 나의 마왕.”
“음, 괜찮으려나?”
“그래. 1월 1일부터 시작해서 며칠 동안은 이른바 신이 머문다고 여겨지는 기간이니까, ‘신년 참배’라는 단어에서는 조금 마력이 느껴지지. 믿어도, 믿지 않아도, 일단 빌어 둔다면 마음의 버팀목이 되지 않겠어.”
“으으으음……. 뭔가 지금, 워즈 행세를 하는 유…… (게이츠의 암묵적인 일갈: 유령 같은 건 없다니까!) ……아니, 가짜 워즈한테 제대로 속았다는 것 때문에 엄청 허무한 상태지만……. 워즈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마왕은 그렇다고 하는데. 나의 구세주, 너는 어때? 바로 조금 전에 그런 일을 당하고 말았으니, 역시 참배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졌을까?”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워즈의 한쪽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있던 백워즈가 짓궂은 태도로 물었다. 게이츠는 여전히 식은땀에 젖은 채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끈해서 항변했다.
“무슨 소리야! 소고가 간다면 나도 간다. 라이벌이란 그런 거잖아!”
백워즈는 재미있어 하면서 게이츠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좋아. 얼굴이 여전히 창백한데 말이지.”
“무리 같은 것 한 적 없어. 다음에 그 가짜 워즈 녀석이 또 나타난다면 마제스티의 힘이라도 써서 가차없이 쓰러뜨려 줄 테니까!”
“와아, 믿음직해라.”
그는 두 워즈더러 들으라는 듯이 선포한 것이었지만 정작 감탄사로 응수한 것은 소고였다. 게이츠는 얼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내색을 했고, 소고는 그를 달래듯이 넌지시 눈웃음을 보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럼 참배 갈까?”
“뭐…… 그래.”
“간다고 한 거다? 아자! 다같이 신년 참배! 게이츠는 소원 뭐 빌 거야?”
“바보냐? 그런 건 어디까지나 비밀로 해야 이루어지는 법이야.”
“엥, 그런 거야?”
“하여간, 너란 녀석은…….”
“아하하. 그래도 말이지.”
때맞춰 멀리서 신사의 입구를 거닐다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츠쿠요미가 눈에 들어왔다. 아, 완벽하게 희소한 하루다. 날씨는 쾌적하고, 날짜는 기념비적이다.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의 존재가 그런 만족감을 부연해 준다. 이런 날이라면 엄수해야 하는 금기 같은 것은 없는 법이라고, 무엇을 누설해도 결코 허황되지 않을 것이라고 소고는 생각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시원하게 웃었다.
“말해버려도, 왠지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