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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현듯 내 맘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 - 해나

가면라이더 에그제이드(2016) / 하나야 타이가 & 카가미 히이로

*에그제이드 트릴로지 어나더 엔딩과 소설 마이티 노벨 X 사이 시점. (가면라이더 겐무즈 시리즈 및 아웃사이더즈 제외)

 

그 모든 일은, 선생님이 두 장의 표를 꺼낸 것이 발단이었다.

 

“자, 이거 받아라.”

 

CR에 볼일이 있다고 한 시간 전에 대뜸 통보해 놓더니, 겁도 없이 불쑥 찾아온 개업의가 나한테 뭔가를 건넸다. 2023년, 요코하마 핫케이지마 씨파라다이스 카운트 다운 야간 패스권 두 장이었다. 개업의가 순순히 이 비싼 걸 분명히 나한테 줄 리도 없거니와, 나나 개업의나 이런 표를 못 살 형편은 아니었다. ‘오, 웬일이래? 둘이 더 친해진 거야?’ 하고 묻는 부검의의 말을 뒤로한 채, 나는 개업의를 쳐다보았다. 그는 날이 춥다고 잘 메지도 않는 목도리를 칭칭 감고 온 게 틀림없었다. 다들 ‘쟤네 둘이 무슨 일 있나?’ 싶은 눈빛을 번갈아 보내면서, 순순히 상황이 돌아가는 것에 반신반의하며 소곤거렸다. 개업의는 이런 잡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맞서 버티는가 싶거니, 한계가 왔는지 슬슬 삐딱하게 자세를 고치고 언짢다는 투로 몇 마디를 내뱉었다.

 

“야, 사람이 뭘 주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영 미심쩍은 게 아니라서,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개업의, 다짜고짜 이런 이유로 CR에 오는 건 너답지 않은데.”

 

“무슨 상관이야? 자, 좋은 말로 할 때 받는 게 좋을 거다.”

 

“그러니까 이걸 왜……”

 

아, 말 안 해줬구나.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개업의가 귀찮다는 듯 뒤통수를 벅벅 긁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니코 그 녀석이 예전에 이름도 모를 데에서 연 온라인 미니게임 이벤트에 참가해서 1등 상을 받았거든. 올해 연말·연초는 일본에서 꼭 보낸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결국 미국에서 게임 대회 패널로 나갈 일이 있다고 내 명의로 표를 수령하게 해 놨어. 번거롭게 말이야, 그럴 거면 왜 신청한 거야?”

 

개업의는 짜증이 난단 투로 퉁명스럽게 이유를 알려주더니, 손목을 까딱대면서 얼른 표를 가져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떻게 얻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왜 하필 나에게 주냐고 묻는 거야.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건 그렇다 쳐도, 고작 티켓 하나 주려고 여기까지 올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의사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 넣고, 개업의를 똑똑히 응시하며 답을 기다렸다. 어디 한 번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들어볼 참이었다. 불순하고도 계획적인 의도가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연말·연초에도 바쁜 게 의사인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새해에 이런 커다란 행사를 보러 갈 수는 있는지 묻지도 않는 개업의에게 실망스럽기도 했다. 분위기가 조금 얼음장 같았는지, 호죠 에무는 아하하 웃으면서 잠깐 볼 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종종걸음으로 CR 밖을 나섰다. 부검의와 뽀삐도 그의 뒤를 잇따라 이 공간을 빠져나갔다. 그러든지 말든지, 개업의는 본인의 입술을 가볍게 맞대어 살짝 앙다문 채로 고뇌하더니, 별거 아니라는 투로 가볍게 대답하였다.

 

“뻔하지. 소아과의는 며칠 안 있다가 잃어버릴 것 같고, 부검의는… 신난다고 동네방네 자랑할 것 같아서. 나는 정중히 그 자리에서 감사 인사만 하고 마는 타입을 원해. 설마 단 쿠로토 그자까지 포함해서 대답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의 표정에서 마치 ‘됐냐?’라는 단어가 일렁거렸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발언이었다. 큼,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서, 남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거군.”

 

결국 나는 마지못해 그의 손에서 티켓을 한 장 빼갔다. 스르르 빠지는 티켓의 촉감이 간지러웠지만 좋았다. 유들유들하고 적당히 광택이 도는 종이로 뽑은 입장권은, 확실히 돈값을 하게끔 생겨 먹었다. 개업의는 픽 웃으며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도련님아. 이참에, 뭐만 하면 ‘No thank you다.’라고 말하는 버릇 좀 고쳐.’ 같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티켓을 곱게 접어서 지갑에 넣으려던 찰나, ‘그것’이 떠올라서 다급히 개업의를 불러 세웠다.

 

“개업의, 설마 우리가 같이 보러 가는 건가? 따로 가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개업의는 뒤로 돌더니 한참이나 멈춰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않고 티켓만 퍼뜩 쳐다보더니, 그는 어렵사리 서문을 뗐다.

 

“…이 티켓은 이벤트 한정 경품 티켓으로, 신분 확인 후 입장 가능합니다. 동일한 일련번호의 티켓이 총 2장 있으며, 이벤트 경품 조건으로 인해 같은 티켓을 소유한 사람 간의 동반 입장만 가능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진짜 싫다. 순간적으로 미간을 팍 찌푸리게 되었다. 그걸 본 개업의는 괜히 그르렁대면서 “나도 기분 나쁘거든. 됐고, 옷이나 잘 입고 와.”라며 쏘아붙였다. 개업의는 의사 가운 깃을 팍팍 털면서 매무새를 다듬었다.

 

“나 간다.”

 

그는 짧은 말만을 남기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는 사람. 왜일까. 그는 이제 바보같이 자기만 아프면 된다고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외로워 보였다. 그의 군화 때문에 딱딱한 굽이 닿아서 복도에 소리라는 자국을 꾹꾹 남기고 갔다. 끽끽, 매끈한 바닥에 닿을 때마다 불쾌한 소음이 일어났다. 하지만 또각또각 울리는 청아하고도 깊은 소리 덕에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 순간을 조금 더 오래 간직해둘 걸 그랬나 보다. 이 기억 속에서 개업의가 내 곁에서 아득히 떠나갈수록 후회가 밀려온다.

 

 

2022년 12월 31일, 오후 1시 반. 입장으로부터 약 1시간 반이 남은 이 시간, 요코하마 핫케이지마 씨파라다이스의 입구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주말 사이에 한 해가 저물고 시작되니 당연한 결과인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 인파에 섞여 개업의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개업의는 아무리 일찍 와 봤자 30분 전에 오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무 곳에나 서서 기댄 채, 서류 가방에 고이 넣어둔 글레이즈 도넛을 하나 꺼냈다. 그걸 우물우물 씹으면서, 개업의가 얼른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둘이 있어야 같이 입장하니까, 이렇게 그를 기다리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전화도 보기 싫었다. 그저 지금처럼, 주변을 관망하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이 지루한 행위를 끝맺고 싶었다. 지각하기만 하면 쓴소리를 늘어놓을 각오로, 나는 열심히 입구 주변을 쳐다보았다. 하품도 해 보고, 손목에 찬 시계도 봐가면서 속절없이 그를 기다린 결과, 개업의는 입장 20분 전에 떡하니 내 앞에 섰다.

 

“휴대전화 연락은 왜 안 봐? 그러려고 휴대폰 들고 다녀?”

 

“…할 말 없군. 하지만 평소 같았으면 그 대사, 이쪽이 치는 게 맞을 텐데.”

 

도착하자마자 메시지를 보낸 이후로 안 읽는 건 변명의 여지 없이 내 잘못이 맞다. 하지만 개업의도 중요한 순간일 때 일부러 연락을 안 읽고 태연하게 ‘아, 그랬나? 알림이 안 울려서 말이지.’ 하고 고의가 아닌 척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뭐?”

 

그는 기가 찬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됐고, 오늘 할 일 읊는다. 수족관도 가야 하지, 어트랙션에, 카운트 다운 라이브에 불꽃놀이…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그 꼬맹이랑 갔었으면 기 빨려 죽었겠는데?”

 

전혀 유쾌하지도 않으면서 썩은 미소를 날리고 앉아 있었다. 은근슬쩍 자기 환자를 여전히 ‘피곤하고 말 많고 귀찮은 JK’로 대신하는 건가, 말의 의도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사실 그것보다는, 오늘 여기서 나랑 무얼 할지 계획을 다 짜놨다는 사실이 의외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가자고. 다리 건너오느라 죽는 줄 알았네. 그 꼬맹이랑 왔으면, 저녁에 안 왔다고 징징댔을걸. 저녁에는 무지갯빛으로 공간이 메워지니까.”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 그리고 네 환자 얘기는 안 할 수 없어? 만나러 온 사람이 무안할 거란 걸 생각해. 개업의, 너답지 않게 오늘따라 말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 안 하나. 그런 너에게도 이점이 있다면, 얼떨결에 당첨돼서 온 사람치고는 사전 조사를 했단 사실이다.”

 

“지금처럼 재수 없는 멘트만 골라 뱉는 법은 어느 학원에서 쏙쏙 배워오는 건지, 나 원 참.”

 

개업의는 날 선 것처럼 대답하고는, 나를 노골적으로 훑어본 뒤 픽 웃고 넘겼다.

 

“그래도 옷은 잘 입었네, 꼴에 도련님이라고 얼어 죽을 것처럼 입는 건 여전하지만. 빨리 들어가. 10분 뒤부터 입장이야.”

 

사계절 내내 똑같은 옷만 입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에게 조언하려고 했지만, 개업의는 혼자 성큼성큼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끽해 봤자 두툼한 노스페이스 숏패딩에 방한용 귀마개를 목에 걸고 있는 게 평상시와의 차이점이었다. 게다가, 먼저 같이 놀러 가자고 한 주제에 왜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뒤따랐다. 카운터에서 각자 챙겨온 표를 꺼내 보여주니, 손쉽게 입장했다. 주변 풍경을 여유롭게 둘러보던 와중, 개업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고기 공포증 같은 건 없겠지.”

 

저걸 지금 질문이라고 말한 걸까. 개업의가 갑자기 나를 걱정해서 말했을 리는 없을 터였다. 어째 대화를 하면 할수록 미간이 찌푸려졌다.

 

“있었으면 진작 No thank you라고 말했을 거다.”

 

“그럼 됐어.”

 

그는 내 손목을 붙잡고 수족관 내부까지 나를 질질 끌고 갔다. 뭔가 강압적인 태도에 당장이라도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주변에는 이곳의 신비로움을 만끽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분위기를 깨지 않고 격식 있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옳았다. 뚜벅뚜벅 걷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니, 푸르른 세상만이 여기에 당도한 기분이 들었다. 쾌적하고 깔끔한 내부 곳곳에 새파란 빛이 새어 나오는 구간이 군데군데 있었다. 암석 사이사이에 핀 산호와 말미잘, 그사이에 자기 몸을 비비적대는 흰동가리, 수중을 휘적이는 블루탱과 깃대돔까지. 개업의는 벌써 유리에 바짝 서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야, 저기 너 헤엄친다.”

 

그는 물살을 가르고 다닐 뿐인 블루탱 한 마리를 콕 집고는, 검지로 그 녀석의 동태를 따라갔다. 단순한 그의 발상에, 나도 일차원적으로 어울러주기로 했다.

 

“파란색이면 다 나인 줄 아나, 개업의. 그렇다면 너는 이거겠군.”

 

나는 연한 초록빛을 띤 말미잘을 가리켰다. 우리는 동시에 상대방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고 노려봤다. 그의 키가 나보다 조금 커서, 나를 내려다보았고 썩 유쾌하진 않았다. 시끄러워, 안티아스나 보기나 해. 그는 선홍색의 안티아스와 옐로탱을 멍하니 관찰했다. 조금씩 고개를 움직이며, 온갖 해양생물의 동선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볼거리가 많은 수족관에 이제 겨우 몇 발짝 들이댄 건데도, 우리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모든 생명체를 조용히 눈 속에 담아냈다. 그들은 아름다웠다. 병원에서는 숙명적으로 초록색과 핏빛에 눈길을 뒀어야 했는데,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색깔들이 존재했구나 싶었다. 그간의 여유를 놓치고 산 게 후회가 되면서도,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에 감정을 형용할 수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아주 천천히 수족관을 돌아다니다 보니, 벨루가 모형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에도 발길이 닿았다. 줄은 그럭저럭 긴 편이었다. 엄청나게 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전율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모형이지만 선하게 웃고 있는 벨루가는 꽤 귀여운 편이었다. 저래서 인기가 많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그 자리에서 우직하게 멈춰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해 버렸다. 내가 너무 열중했던 걸까. 개업의도 벨루가를 흘겨보더니 이쪽을 바라보고 나지막이 말했다.

 

“…도련님, 너도 저런 거 찍고 싶냐?”

 

“……그냥 귀여워서 쳐다봤을 뿐이다.”

 

개업의에겐 눈길도 안 주고 뱉는 나의 말에, 그는 턱을 쓸어 만지며 흥미롭다는 듯 피력했다.

 

“호오, 그래?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하나 찍고 가지 그래? 찍어줄게.”

 

“그렇다면 한 장씩 같이 찍도록 하지. 나만 찍기에는 뭐하지 않나.”

 

“차마 같이 찍자고는 말 안 하는군.”

 

뭔가 섭섭하다는 톤으로 얘기를 툭 꺼내는 개업의였다.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서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덕분에, 내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잔뜩 섞여 나왔다.

 

“내가, 개업의 너랑?”

 

애초에 ‘찍어준다’라고 했으니 당연히 독단적으로 사진을 남기는 줄 알았는데. 뭔가 어안이 벙벙해지는 느낌이었다. 개업의는 찬물을 확 끼얹어 맞은 것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별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주제에 선 긋는 거다, 이거지?”

 

“그게 아니라……”

 

본의 아니게 말로 다시 상처를 준 것 같아,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말은 뭔데.”

 

그는 주머니에 깊게 찔러뒀던 손을 꺼내 내 뺨을 잡더니 고개를 확 꺾게 했다. 그의 눈빛에서 단 한 문장만을 읽을 수 있었다. ‘시건방지게 시선을 얻다 팔아먹고 다니냐?’ 순간 섬뜩했지만, 마냥 혐오스럽게 다가오진 않았다. 얼핏 보면 그의 태도는 예의 없는 듯했지만, 개업의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표현으로 점잖게 예의를 가르쳐준 것이었다.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내 등을 떠밀면서 전진했다. 나는 강제로 밀리는 느낌이 걸리적거려서 결국 잰걸음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와 줄을 섰다. 빠른 판단력 덕분에 이 뒤로는 슬슬 사람이 더 붐비기 시작했다. 그는 느긋하게 그곳을 행보하더니, 나를 기준으로 앞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언질도 안 한 채 자연스럽게 줄에 꼈다. 그 때문에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게 민망했지만, 그는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는지도 모른다는 얼굴로 거기에 우뚝 서 있었다. 나는 개업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닥거렸다.

 

“개업의,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끼어들면 어떡하나.”

 

“뭐, 어때. 여기서 너랑 나랑 일행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있겠지. 그리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개업의는 내 말은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내 어깨가 받침대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의 팔을 얹은 채로 인파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거 무거우니까 내려놓지 그래. 나는 서류 가방을 든 손으로 그의 팔을 툭툭 쳤지만, 개업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가 ‘팔 저리네.’ 같은 황당한 말만 하곤 앞사람이 거의 다 빠졌을 때쯤에 스르르 팔을 내렸다. 팔이 저리면 곧장 내려놓든가 해야 하지 않나? 부검의도 아니면서 유난히 거짓말이 많은 그에게 슬슬 싫증이 나려 했다. 그래도 무료로 이곳에 오게 해 준 장본인이란 사실만 기억하며 화를 꾹 참았다.

 

몇십 분을 기다린 걸까? 가족과 커플, 친구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서히 빠지고,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둘 다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뒷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사진 좀 찍어주세요.”

 

부탁한 건 나인데, 개업의는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왜소한 크기의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그 사람들에게 건넸다. 저런 걸 챙기고 오다니, 설마 여기서 사진 찍는 것까지 다 구상하고 온 건가? 이제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나한테 표를 건넬 때는 분명 짜증스럽다는 듯 굴었던 그가, 막상 당일이 찾아오니 이것저것 다 알아보고 하나하나 준비했단 게 쉽사리 믿기지는 않았다. 커플에게 부탁해서 그런 건지, 따로 찍기로 하자고 약속한 것과는 달리 우리는 벨루가 모형의 양옆에 어정쩡하게 붙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한 발짝, 두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자, 찍을게요―”라는 말과 함께 신중히 셔터를 눌렀다. 아무래도 그 비좁은 화면 안에 우리와 벨루가를 온전히 담기 위해 뒷걸음질 친 거겠지. 순간 눈이 멀 정도로 허연빛이 팡 터져 나오더니, 사진기에서 결과물을 툭 뱉었다. 눈부셔할 틈도 없이 버튼은 한 번 더 눌렸고, 망가졌을지도 모르는 표정을 고쳐보지도 못한 채 우리의 기회를 소모했다. 그분들은 사진기와 폴라로이드 두 장을 건네줬고, 우리는 거기서 쓸데없이 붙잡혀 남을 위해 시간을 쓰진 않았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찍어달라고 부탁하고 있길래 안심하고 거길 빠져나왔다는 뜻이다.―

 

아직은 빈 화면 같은 인화 사진이 얼른 나오길 기다리며, 우리는 다양한 곳을 둘러보았다. 그 수족관에서 본 생물들은 대략 이 정도가 있었다.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통통한 체형을 보유한 물개들은 천하태평이었다. 돌 위에 누워 턱이 두 겹인 걸 전시한 채 자는 녀석도 있는가 하면, 사육사에게 생선을 얻어먹는 녀석, 물속에서 열심히 헤엄치는 녀석도 있었다. 북극곰은 몇 마리 없는 데다가, 시끄러운 수족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건지 피로함을 가시기 위해서 푹 자고 있었다. 조명 효과 때문에 일렁이는 파광(波光)으로 한 아름 채운 공간에는 펭귄들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서 있길래, 개업의가 우리 같다고 하는 말에 우리는 펭귄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이제 나이도 어느 정도 찬 어른들이 귀엽고 하찮은 동물과 닮았다며 기뻐하기엔 양심이 없지 않은가. 수족관 안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길에서는 커다란 고래상어와 그 주변을 꽉 채워서 에워싼 물고기 떼를 봤다. ―개업의의 설명을 들으니, 그 물고기는 아마도 꼬치고기의 일종 같아 보였다.― 살면서 고래상어를 이렇게 가까이 볼 일이 있을까? 그 위압적인 크기에 압도되어 웅장해지는 느낌이었다. 위층에는 험악하게 생긴 상어도 존재했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로 경고하는 느낌이었다. 개업의는 내 코트의 팔 부분만 잡아서 툭툭 끌더니, 얼른 가자는 눈치를 줬다. 뭔가 잔뜩 졸아버린 눈빛으로 나와 상어를 번갈아 보길래, 무서운 거냐고 물어봤지만 당돌하게도 헛소리한다며 나를 깠다. 하지만 헛소리치고는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나는 그에게 상어는 수조 밖으로 나올 리 없으니 안심하라고 말을 건넨 뒤, 그와 함께 자리를 떴다.

 

 

“피곤해 죽겠네.”

 

그는 하품을 땅이 꺼질 기세로 푹 쉬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느덧 올해가 떠나가기 1시간 전이었다. 서류 가방에 넣어 챙겨둔 돗자리로 미리 자리를 잡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이 철야 속에서 한참이나 기다리며 롤러코스터를 타고 왔는데도 자리는 그대로였다. 푸드트럭에서 사 온 핫도그와 음료수를 먹으며 밤 풍경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조명으로 곳곳을 메운 이곳은, 흡사 은하수를 똑 떼어온 것 같았다. 네가 이 일루미네이션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전히 가상의 공간에 데이터로 묶여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음식을 편하게 섭취할 수는 없었다. 입이 텁텁해지고, 목이 막히는 기분이라 숨도 쉬지 않고 콜라를 몇 모금 마셔보았다. 그래도 한번 가라앉은 기분은 다시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 의료진들이 세월을 투자해가며 일해오고 있지만, 거기에 갇혀 있는 네가 생각날 때면 몇 년이나 제자리걸음을 하는 건 아닐까 나 자신이 의심스러웠다. 불빛이 슬며시 깜빡깜빡 움직일 때마다 눈물도 조금씩 차오를 듯했다. 개업의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주머니에 한 움큼 쑤셔둔 냅킨을 내 무릎 위에 올려두고는 입이나 훔치라는 듯 눈치를 줬다.

 

“도련님,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은데, 뭔 바람이 든 건지 몰라도 여기서 무너지지 마라.”

 

같이 봐야지, 이런 풍경. 그는 암흑만이 깔린 하늘만 쳐다보면서 입김을 후 불었다. 잠깐이나마 하늘에 옅은 구름이 생겨난 것 같았다. 아무런 의미 없는, 그런 행동에 나도 잠시 마음을 비우고 오늘의 추억을 떠올리기로 했다. 해삼의 촉감을 체험해볼 수 있는 곳에서 서로 기겁하며 먼저 만져보라고 난리를 피웠던 걸 생각하니, 참으로 우스워서 실소했다. 심연에 존재하는 이유가 절로 납득되는 심해 생물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잔뜩 비방했던 추억도, 말랑해 보이는 해파리들이 단체로 흐물대는 꼴을 보면서 잠시 뚱하게 응시하기만 했던 시간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렇게 내가 여러 기억에 잠겨 있는 동안, 그는 장갑 낀 손을 붙여 마구 비볐다. 상상의 흐름이 깨져서 시끄럽다고 하려고 했지만, 그는 잠깐 실례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내 서류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개업의는 곧장 핫팩 하나를 빠르게 까더니 한 손에 쥐고 흔들어댔다. 당당한 갈취 행동에 순간 황당해져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어쩌라고. 그는 귀마개를 쓴 다음,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고 입만 대뜸 벙긋거렸다. 목소리도 안 듣겠다는 저 굳은 의지에, 나는 혀를 차면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 곧 있으면 카운트 다운 라이브구나. 잠시 후 음악이 흘러나오더니, 진행자의 목소리라 쩌렁쩌렁하게 이곳에서 울려 퍼졌다.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가슴은 옥죄어왔다. 이렇게 한 해가 가는구나, 싶어서 설레면서도 긴장됐다. 30분이나 남은 걸까, 30분밖에 안 남은 걸까. 시점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사람의 심리가 갈대처럼 마구 흔들거렸다. 개업의는 자기가 쓰던 핫팩을 나에게 쥐여주고는, 팔짱을 낀 채 쪼그려 앉으며 말을 걸었다.

 

“난 새해 라이브 좀 보고 갈 거다. 그다음은 알아서 해. 너 혼자 일출을 보든지…”

 

굉장히 김빠지는 대답을 들으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나는 어째서 혼자 가냐고 물었다.

 

“야, 본전 치겠다고 3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놀았는데, 일출까지 보겠다고 버티는 네가 더 대단하다. 그리고 보다시피 나는 늙어서요.”

 

“무슨 말을 그렇게……”

 

“적당히 알아들어. 내가 너 비꼬려고 한 말인 줄 알아?”

 

마음만 같아서는 “그래 보이는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으려고 했다. 와중에, 잔잔한 음악 사이로 ‘10! 9! 8!’ 하며 곧 있으면 하늘에 꽃이 만개한다는 신호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그 말에 우리는 고개를 동시에 돌려 저 위를 올려다봤다.

 

“해피 뉴 이어!”

 

펑, 시끄러운 폭발음이 연신 터져 나오더니, 하늘에는 형형색색의 불꽃이 개화해버렸다. 그 찬란한 절경에 감탄만 나왔다. 동공을 꽉 채우는 꽃놀이는, 가슴 한편을 탁 트이게 했다. 각각의 빛깔이 꼬물꼬물 빈 공간을 수직으로 기어오르다가, 누군가 톡 건드린 듯 활짝 꽃봉오리를 벌리더니 삽시간에 영롱한 색을 띠며 공중으로 퍼져 서서히 사라졌다. 그 소멸에 아쉬워할 틈도 없이, 다른 꽃이 속속히 난발하곤 했다. 우리 둘은 그 어떤 잡담도 나누지 않은 채, 하늘이란 캔버스에 그려지는 한 폭의 그림을 감상했다. 그 순간일 때만 나올 수 있는, 특유의 정취에 흠뻑 젖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한 셈이었다.

 

어느새 불꽃놀이도 끝이 났고, 개업의는 심포니아의 결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곁눈질로 서류 가방을 가리켰다.

 

“도련님, 이따 집 가서 가방 확인해 봐.”

 

지금 확인해 보려고 가방을 집자, 그는 엄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나를 제지했다.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반응에 쓰레기라도 넣어서 골탕을 먹이려는 건가 싶었다. 그는 이상해져 버린 나의 표정을 보고 픽 조소하더니, 손사래를 치며 너그럽게 구는 투로 대답했다.

 

“왜 그래? 표정 풀어. 내 마지막 선물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배웅해주려다가,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꽂혀 그를 다급히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 어찌나 다급했는지, 나는 그의 다른 호칭을 불러버렸다. 왜였을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절대로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무심결에 나온 단어 같았다. 하지만 내가 뒤를 돌아 그를 찾았을 때는, 그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젠장, 왜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 거야! 아까랑 다르잖아! 그가 뭔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벌써 큰일을 저지른 것처럼 쓴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뒤로는 핫케이지마 씨파라다이 어떻게 보냈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뚝 떨어진 기온에 실내로 들어와 야키소바와 감자튀김을 주문해, 그걸 하나씩 절제해서 먹을 때도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높이의 블루 펄을 혼자서 타고 있는 중에도, 머릿속은 ‘개업의는 겁쟁이니까 절대로 타자고 안 했겠지.’라거나 ‘그 사이에 누가 내 서류 가방을 뒤적거리진 않겠지?’ 같은 잡념들로 가득 차서 온몸으로 느꼈던 중력의 크기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는지도 체감하지 못했다. 무지갯빛 터널을 지나칠 때는 개업의가 사이바 니코 얘기를 괜히 꺼낸 것이 생각났고, 드넓은 바다 너머로 뜨겁게 타오르는 붉은 해가 서서히 솟구쳐 올라올 때는 개업의는 자느라 이 순간을 생눈으로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추측이 돋아났다. 내 가방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곤히 자고 있을 ‘마지막 선물’이 대체 무엇일까. 거기에 온통 신경을 쏟느라, 남은 시간을 훌러덩 넘겨버렸다. 흔들다리처럼 불안한 그 어감은, 귓가에 한없이 맴돌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그 누구보다 일찍 CR에 와서 서류 가방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일출을 보고 야간 서비스가 종료되는 오전 8시에 전철에 몸을 맡긴 채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는 일할 컨디션이 도통 아니었다. 아버지가 있으니, 병원 인력이 하나 줄어서 어쩌나 걱정하지 않고 푹 쉬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런 의심 없이 가방을 열었다가, 위화감이 드는 형체가 어둠 너머로 보여 재빨리 손을 집어넣었다. 그것은 익숙하게 한 손에 잡혔다. 잊을 수 없는 그립감이었다.

 

‘이건… 가샤트?’

 

갓 맥시멈 마이티 X와 드라고나이트 헌터 Z 프로트 가샤트의 합체본이라니! 어떻게 개발한 거지? 데이터를 훔친 건가? 눈앞에 놓인 혼종에 믿기지 않아, 곧장 연구실로 뛰쳐나가 가샤트들을 살펴봤다. 앞서 말한 가샤트들은 모두 CR에 잘 보관되고 있었다. 갓 맥시멈 마이티 X은 단 쿠로토의 게이머 가샤트와 함께 있었고, 모든 프로토 가샤트도 우리가 철저히 간수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몇 년이나 머리를 감싸도 좀처럼 치료용으로 상용화하기 어려웠던 갓 맥시멈 마이티 X를 당당히 ―그것도 프로토 가샤트와 섞어서― 나에게 선물한 걸 보아하니, 이 가샤트의 상태는 완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절대로 미제품 따위를 떳떳이 내밀어줄 사람이 아니었다. 아연실색하기도 잠시, 나는 동봉된 쪽지를 꺼내 흐릿하게 읽어보기 시작했다.

 

[준비물은 게이머 드라이버, 적합자 본인의 변신용 가샤트. 우선, 이 가샤트의 버튼을 먼저 누를 것. 그다음, 적합자 본인의 변신용 가샤트를 게이머 드라이버에 장착하고 변신할 것.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내가 준 가샤트의 버튼을 누른 후 드라이버에 넣어 레벨 업 할 것. 과정 하나하나가 중요하니, 꼭 천천히 실행하길 바람. 카가미 히이로, 올 한 해도 고생 많았다. - 하나야 타이가.]

 

짧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가샤트를 자세히 관찰하였다. 씰은 두 개의 가샤트 스티커를 정확히 대각선으로 반을 나눠 붙인 것처럼 중앙부가 뚝 잘렸지만,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디자인만 그렇게 제작하고 하나로 인쇄한 걸까. 가샤트의 몸체 색상은 세 가지 색상이 그라데이션으로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금색보다 밝고 채도 있는, 고급진 노란색, 독을 연상케 하는 보라색 그리고 새카만 검은색. 누가 봐도 레벨 5의 드라고 나이트 헌터 Z와 갓 맥시멈 마이티 X, 드라고나이트 헌터 Z 프로트 가샤트를 차례대로 이은 게 틀림없었다. 손잡이 부분의 색깔도 갓 맥시멈 마이티 X에서 본, 살짝 연한 빨간색이었다. 외형 디자인은 드라고 나이트 헌터 Z를 빼다박은지라, 본체의 밑부분에 용의 낯짝이 박혀 있었다. 정말로 혼자서 개발한 게 맞은 걸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가 차린 폐병원에 CR이 게임병 연구를 위해 일부를 지원해준다고 해도, 독자적으로 이런 걸 개발한다고 하면 금방 눈에 띄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걸 발명하고 싶었다면 충분히 우리의 손을 빌릴 수 있었다. 그게 서로에게 편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는 나에게 갑자기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가샤트를 남몰래 선물해준 셈이었다. 아무도 없는 시각에 일찍 온 걸 다행으로 여기기도 전에,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샤트의 버튼을 눌렀다. 아, 익숙한 효과음. 그 소리가 갑갑했던 속을 조금이나마 탁 트이게 해 줬다. 가샤트는 하얀빛을 뿜으며 반짝였고, 데이터가 실체화된 입자들이 대량으로 출몰해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사람의 모습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완성체를 본 순간, 나는 하마터면 가샤트를 요란하게 떨어트릴 뻔했다.

 

“……사키?”

 

사키? 사키 맞지? 사키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면서 치직거릴 뿐이었다. 나는 이성을 잃은 채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툭툭 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데이터라는 걸 증명해내듯, 내 손 안에 잡히지 않고 무력하게 흩어졌다가 다시 뭉쳐졌다.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골똘히 고민해보았다. 정말로, 개업의가 프로토 가샤트 속에서 사키를 꺼내온 걸까? 그게 가능한 건 버그스터 혹은 가면라이더 크로니클, 그것도 크로니클을 완벽히 다룰 수 있는 단 마사무네만. 개업의도 크로니클로 변신할 수 있었지만, 그는 완전한 크로니클이 되기 어려운 몸이었다. 부작용을 겪은 그는 거기서 더 무리할 수 없었다. 기적을 만들어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스스로 버그스터가 되었다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주먹을 꽉 쥔 채, 그가 만약 버그스터가 되었다면 이 손으로 절제 수술을 하기로 다짐했다. 몇천 번이고, 몇억 번이고 썰어버리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괜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바보 같은 선택을 선생님이 안 했길 바라면서, 나는 태들 퀘스트 가샤트를 넣고 변신했다. 내가 브레이브로 변신해도 사키의 상태는 딱히 달라지진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열심히 뒤져봤지만, 역시나였다. 나는 긴장감을 가라앉히려 침을 꿀꺽 삼킨 뒤, 다시 한번 그 가샤트를 손으로 잡았다. 버튼을 누르니, 가샤트는 다시 환한 빛을 냈다.

 

“레벨 업!”

 

음성 기믹은 챙기지 못했나 본지, 이후에 나올 소리에는 잡음이 가득 껴 도통 알아듣기 힘들었다. 멜로디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발음은 기분 나쁘게 뭉개져 있었고, 조화롭고 신나는 음이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레벨 업이 진행될 때, 사키 곁에 찬란히 빛나는 효과가 마구 맴돌더니 그녀를 한번 뒤덮었다. 그러고 나서는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빛은 영롱하게 옅어졌다. 그 아름다운 빛은 사키의 주변에서 멀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연히 사라졌다. 그 어떠한 수식어도 필요 없을 만큼, 그 순간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것만을 빼면 상황은 이전과 똑같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 사키는 지직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그녀의 어깨를 슬며시 밀었다. 그제야 가만히 있던 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활짝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히이로!”

 

오랜만에 듣는 나의 이름. 그녀가 내 이름을 다시 부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감격스럽고, 무한히 감사한 지금, 이 순간에 눈물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울보 같은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내가 알던 그녀가 그랬듯이― 다정하게 굴면서 힘을 더 줘 나를 품 안에 꾹 담아내려 애썼다.

 

“히이로, 진짜 대단하다. 정말로 해냈구나? 나는 히이로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의사라 될 거라고 믿고 있었어.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사키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수록, 내 가슴은 점점 후벼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당장이라도 헐어버릴 것 같은 목청을 가다듬은 뒤 겨우 말했다.

 

“응, 사키, 나도 고마워. 이렇게 잘 있어 줘서… 고마워. 나를 미워하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마워…….”

 

“미워할 게 뭐가 있어. 우리 사이에 사과하진 말자. 너도 힘들었을 거야.”

 

사랑해. 우리는 그 말을 주고받았고, 주변에서는 조그마한 불꽃 효과가 팡팡 터져 나왔다. 그녀에게 기대어 파묻었던 고개를 꺼내, 천장을 올려다보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뭔가가 등장했다.

 

“게임 클리어!”

 

‘익숙한 글씨체와 효과음이 흘러나온다.’, 라고 생각하자마자 아차 싶었다. 게임 클리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이제 서로에게 갚을 빚은 없는 걸로 하지. 자초지종은 나중에 설명할 테니, 신년을 즐길 여유를 가지라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울지 마. 넌 짊어질 게 많은 녀석이다.”

 

‘이미 울었다고.’

 

……선생님. 나는 알고 싶지 않았던 면을 마주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이 먼저 떠올랐다. 당연히, 우리의 해피 엔딩을 위해 배드 엔딩에 가까워진 당신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당신의 입으로 직접 그 과정을 설명해주기 전까진, 나는 그날 당신이 나를 두고 먼저 자리를 뜬 이유를 추궁하지 않으려 한다. 후회하지만, 내가 붙잡는다 해도 붙잡히지 않을 당신이니까, 얘기할 준비가 되었다면 다시 돌아와 주길.

 

불현듯 내 맘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당신이 다리를 놓아줬기에, 한 남녀는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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